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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 주사파, 그리고 한국 사회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8. 25. 11:38

아래 내용은 김영환 (전 ‘시대 사상대표) 씨가 어느 강연회에서 했던 연설 내용을 UTDTimes.com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소개를 간단히 드리자면, 저는 과거에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80년대 여기 계신 분은 아시겠지만 주체사상파의 최대 계파를 제가 만들었습니다. 90년대 초까지 제가 주사파를 주도하면서 지하혁명당 조직을 만들어 주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 잠수정을 타고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북한 고위급 인사를 만나고 김일성도 2차례 만나서 북한사회의 본질, 주체사상의 본질을 뼈저리게 깨닫고잘못된  사상임을 깨닫고 사상을 바꿔서 운동권에 빠졌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고 북한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운동에  지금까지 매진하고 있습니다.

일단 주체사상이라는 이론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복잡하고 딱딱하고 어렵습니다. 이론적으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살아온 인생 자체가 주체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주체사상에 빠지게 되었고, 북한에 과정을 거쳐서 가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체제의 본질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운동권에 빠진 특별한 계기는 없습니다. 경상도 안동 출신이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님도 자상하고 형제간에 화목했습니다.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1982 서울대 법과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았던 시대 자체가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역사, 철학 서적을 많이 읽다보니까 신문도 꼼꼼히 읽었던 편입니다. 1 부마 사태, 대통령 피격, 2 광주 민주화 운동, 5.17, 5.18 일어났었고 과정을 거치면서 그런 정치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대학교에 가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운동권 서클을 찾았습니다.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라든가 노래가 상당히 계급 혁명을 선동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학생 운동이 좌경화되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상 부딪혀보니 학생운동이 좌경화 측면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들과 논쟁을 해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어 서클에 들어갔습니다. 선배들과 논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계급 이론과 유물 변증법이 잘못됐다고 말을 하면서 선배들을 깨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서울대 전체에서 도서관의 책을 가장 많이 빌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배와 토론을 하면서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하긴 했지만 선배들의 경우 체계적으로 역사, 정치, 경제, 철학을 짜임새 있게 빨아들이도록 가르쳐서 청산유수로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고, 지식이 단편적임을 많이 느꼈습니다.

요즘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가르친다고하지만 70년대에는 너무 지나치게 한쪽으로 가르쳤습니다.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을 전혀 가르쳐 적이 없었습니다.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면서 저도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들의 아편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철학, 정치 등을 아주 멋지게 구조적으로 엮어 놓았습니다. 당시 대학에서 국민윤리 교육은 반공교육이었습니다. 교수님조차도 반공교육을 하면서 공산주의에 넘어갈까 말까 정도로 논리와 이론에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2학년 중반 되었을 때도 저는 이미 열렬한 좌경 학생 운동권의 중요 멤버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부터 학생운동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4학년이 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점차 기존의 마르크스 주의가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Cynical 비판이 좋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마르크스 주의와 관련해서 그런 문제점뿐만 아니라 헛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나라 아시아 마르크스 주의가 적합한 사상인가, 마르크스가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서 정리를 했지만, 서양에만 해당되는 이론이지 한국, 아시아와는 깊이 상관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에게 적절한 새로운 세상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주의(ism)  주장 이론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종속 이론을 찾아보았습니다.  이는 각종 학자들의 이론을 모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깊이도 낮고 이론도 조잡했습니다. 마르크스 주의의 아류였습니다.

중국의 모택동과 관련된 사상도 찾아보았습니다. 이것도 마르크스의 아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게 것이 북한의 주체사상이었습니다. 당시 활용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에서 만든 대외비 자료, 석사과정 이상의 사람만 있는 자료인데, 운동권에도 석사과정 사람이 많으니까,. 비밀리에 도는 자료를 있었습니다. 김일성 이름, 김정일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체사상이 정연화된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계적인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매력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유교신자도 아닌데 동양에서 화두라고 해서 짧막한 마디로 신비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런 있잖습니까. 깊이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있는데 그런 이미지를 주체사상에서 발견. 지금까지 체계화된 논문으로 나온 주체사상을 적이 없습니다. 50페이지 이상으로 논문이 없습니다. 짧막하게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동양적인 신비로움을 주었습니다. 깊이 있을 같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편으로 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마크크스주의는 철학이 있지만 수천 수만의 마르크스 주의 철학자에 의해 세세한 것이 밝혀졌는데 주체사상은 그렇지 않아 저의 학문적인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북한 체제라든지 북한 사회, 김일성, 김일성의 과거 항일운동 등을 호감을 갖고 접근. 운동권에 이를 적극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강철서신이었습니다. 지하 유인물이었습니다. 제가 강철이라는 이름으로 5편의 서신을 썼는데 운동권 사이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주사파가 되지 않았는데 3-400명으로 늘어났고 불과 6개월 후에는 5천 명으로 늘어났고 1 후에는 학생운동권의 70% 주사파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빨리 확산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권과 전두환 정권의 대립이 최고조의 상태였기에 운동권에서 스폰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그런 과정에 저는 경찰과 안기부, 집요한 추적 끝에 잡혔죠. 잡혀서, 엄청나게 고문을 많이 당하고, 7 형을 언도 받았지만  정치적 격동기라  21개월 후에 사면이 되었습니다. 사면이 되었으면 반성하고 있어야 했는데 1988 12 말에 출소를 했는데 불과 3달도 되는 89 33일에 반제 청년 동맹이라는 지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2 후에는 민족 민주 혁명당이라는 이름으로 개편해서 활동했습니다.

북한 공작원이 그때 접근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북한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고 북한에 대해 뭔가 알고 싶은 생각이 강했기에 쉽게 서로 연결을 갖자는 제의에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공작원이 북한으로 돌아가고 2 후인 1991 5월에 북한에서 저를 초청한다는 연락이 와서 제가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을 타고 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북한의 반잠수정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저에게 잠수정에 대해 물어보곤 합니다. 특별한 없고 10M 길이의 아주 작은 잠수정입니다. 저를 호위하러 사람이 6명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떻게 탈까 정도로 작았습니다.  구성원들은 여러 왔다 갔다 했던 같습니다. 요즘은 음파를 탐지하는 장비가 고도화 되어 드나드는데 당시에는 자주 드나들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북한의 반잠수정을 타고 가서 간략하게 가지만 말씀드리면,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북한주민과 대화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옆에 고위간부가 따라다니니까 주민과 대화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을 충분히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곳을 다니기는 했습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과 고등학교 곳을 가고 싶다고 해서 그쪽에서는 개선문과 주체사상 등이었습니다. 김일성 대학이나 망령대 혁명학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대학생도 멕아리고 없고, 희망도 없어 보이고, 창의성도 없어 보이고,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주체사상탑을 방문했는데 주체사상탑에서 관리하는 사람이, 일반인들이 올라가지 못하는 통로가 있었던 같아요, 관리인이 부르더니 XX 거기가 어디라고 올라가?” 말단 공무원이 주민들을 평소에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길 원해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70-80년대 초반에 말단 공무원이 시민들을 그렇게 대한 적은 없었는데 북한은 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높은 간부들이 낮은 간부들을 대할 때도 강압적으로엄청나게 면박을 주고 강압적으로이게 무슨 사회주의인가. 훨씬 불평등화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워낙 철학과 주체사상에 관심이 많다 보니까 학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난 사람은 똑똑해 보이고 지식도 많아 보였습니다. 이틀 간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야기가 막힌다는 느낌을 지울 없었습니다. 자꾸 막히지 이야기가 겉돌지, 이야기하다보니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오류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데, 수령이 이런 오류를 범하려고 ,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수령님 이것은 아닙니다라고 하는게 올바른 자세인가수령은 무오류이니까그렇게 하십시오어느 것이 올바른 자세인가 물어보았습니다. 양반들이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양반들이 이해를 못했다고 생각하고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전히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아니라 사람이 대답할 없는 질문을 했구나. 북한에서 수령에서 잘못된 이야기를 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사람이 주체사상 연구에서 엘리트인데 그런 문제도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연구하지 못하면, 북한의 주체사상에 어떤 미래가 있는가 하고 생각. 후에 후배하고 이야기하면서 주체사상 연구의 자유가 가장 없는 나라가 어디인가'라고 물었는데 후배는 남한이라고 했지만 저는 아니다. 북한이다. 북한에서는 연구학자이고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조금만 벗어난 이야기를 자유가 없다. 주체사상 연구의 자유가 없는 나라가 북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주체사상을 내세우면서 새로운 비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북한이 주체사상을 갖고 있는게 없고 아무런 비전이 없다고 생각습니다. 며칠 후에 김일성을 만나러 갔습니다. 2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고 식사하면서  1시간을 추가로 대화. 오라고 해서 뒤에 가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외부 손님이 가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낸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1930년대 자신이 항일 운동한 이야기를 하고 외국 정상이 방문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주체사상과 관련해 이야기를 하는데, 주체사상에는 주체철학과 민족공산주의, 수정론이 있는데 제가 이야기를 꺼내면 주체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김일성은 민족공산주의만 이야기했습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나중에 깨달은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만든 사상이었지만 자신이 몰랐습니다. 제가 그래서 나중에 황장엽 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봤냐고 했습니다. 주체 철학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황장엽 씨는 김일성은 소설책이라도 읽는데 김정일은 소설책은 읽는다 말을 덧붙였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발표된 사상이면 기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기본적인 도의와 자질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내려와서 북한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꼈습니다. 너무 깊이 빠져 있었고 너무나 저를 중심으로 해서 뭔가 편으로 역사의 커다란 고리를 만들어 놓았기에 좋은 점에서 보면 하나의 정치적인 기반인데, 송두리째 없애 버려야 하고, 다른 편으로는 역사적인 죄가를 만들어놓은 것인데 이를 인정하고 떠안고 가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심적으로 어려웠습니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경험한 강철환 씨와 안혁 씨가 얼마 귀순했습니다. 북한의 생생한 증언을 이들이 했습니다. 저는 환멸을 느꼈는데 이는 환멸을 느끼는 수준 이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편으론 슬프고 편으로 분노했습니다. 굶어서 괴로우니 중국으로 쌀과 보리를 가는 사람, 갔다오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코에 철사를 달아서 잔혹한 범죄행위를 서슴치 않고 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더는 묵과할 없겠다. 혁명가로 10 이상을 살았는데, 헉명가는 민중들이 원하는길, 민중들이 요구하는 것이 부응하는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혁명가라는 내가 이런 것을 외면하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한 민중의 해방을위해,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해 바치겠다고 생각하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동지들에게 편지를 써서 북한 사회는 이러이러하게 아주 인권이 처참하게 유린되고 있고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고 민중의 상태는 악화되고 있다, 우리가 혁명가로서 북한 민중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동의하면 편이 되는 것이고 반대하면 나의 적이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에 3분의1 정도는 개인에 대한 믿음 때문에 저와 같이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31 이전 생각을 버릴 없어서 길로 갔고, 나머지 3분의1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까지 제가 북한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체사상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체사상은  1930년대에 김일성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1930년대에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을 없습니다. 조작된 것입니다. 문헌상으로 주체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1955 연설을 했는데 이름 붙인 ‘…..주체를 확립할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때 주체사상이 만들어졌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주체철학을 만든 사람은 황장엽 씨다. 황장엽 씨가 김일성 총장을 하던 1964 총장 사상 담당 서기를 했습니다. 실제로는 사상 담당 서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황장엽 씨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만들어낸 것이 주체 철학입니다. 갑자기 등장했나? 여러 배경이 있는데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입니다. 50년대 중후반부터 소련파, 연안파, 갑산파 내부의 다양한 세력이 김일성과 권력 투쟁을 했습니다. 이들을 김일성이 숙청.소련파, 연안파를 숙청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산파를 숙청할 때는 힘에 부쳤습니다. 소련파와 연안파는 국내 실정에 어두웠고 기반이 약했기에 쉽게 쳐낼 있었는데, 국내에서 기반이 강했던 갑산파의 경우 쉽지 않았죠.   과정에서 기반을 세울 사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는데 이는 국가 원수가 수상제에서 주석제로 바뀌었고, 주석의 권한은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이 장악하여 김일성 유일 체제를 확립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 주체 사상을 헌법에 최초로 규범화하였습니다. (중략)

주체사상은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50페이지짜리가 이데올로기라고 있겠습니까. 북한은 주체사상에 따라 운영되고 있나? 결코 아닙니다. 김일성도 모르는 주체사상인데, 그것으로 통치된다고 없습니다. 북한의 통치는 마르크스 주의의 기본적인 이론과 하나는 그냥 김일성, 김정일이라는  사이비 종교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라고 결론낼 있습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이론적인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정치 투쟁의 도구, 장기집권, 절대권력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진 사이비 이론이라고 있습니다. 거창한 것으로 오해하거나 무서운 위력을 가진 것으로 오해해서는 됩니다.

(질의 응답)

(질문) 들림

(답변)   간첩의 규모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과거에는 12시가 되면 평양방송에서 12 정각부터 1시간 동안 대남 지령문을 내보내거든요, 숫자 방송이라고 해서 숫자를 읽는데 호출번호가 있는데 공작원에게 배정된 번호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만 배정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10 동안 숫자를 종합해보니까, 400 정도 숫자가 나왔는데, 중요한 사람이면 사람 앞에 10 정도 주어지고 중요하지 않으면 2-3 주면 평균 4 정도 주어졌다면 100 정도 있는 것이 아니냐 추정. 국정원에서 100 정도이지만 절반 정도는 실제 활동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  50 정도로 봅니다. 2천년 중반 이후에 들어온 사람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족이나 탈북자로 위장해서 침투한 사람들이 간첩으로 보고 있다. 100 정도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  현재 주사파의 규모를 이야기를 하자면, 어쨌든 열성적인 주사파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활동하던 시기에 운동권 주사파 규모가 열정적인 사람만 1 , 동조자를 5 명으로 추산, 지금 시점에서 주사파의 규모를 제가 열성적인 사람을 200, 동조자까지 합해 2-3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많이 줄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사파라기보다는 사회 곳곳에 들어가 있는데 주사파는 아니지만 우리와같은 주사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사파라고 없고 대학 2-3학년까지만 활동하다가 생업으로 들어간 사람들. 판사, 기자, 방송국 PD, 교수를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이런 사람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사고가 경직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 레닌 주의를 학습하고 생업으로 돌아가 고시 공부를 해서 업무와 관련된 것만 하니까, 정치, 시국 등에 대해 고민이 중단. 운동권은 아니고 주사파는 아니지만 사고가 대학 2-3학년 상황에서 멈춰져 있습니다. 사고가 경직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언론사, 법조계, 교육계에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이 때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방송국에도 보면 친구들이 대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법조계도 보면 부장판사를 보면 우리 세대입니다. 교수들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나이 또래.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분들 생각이 틀렸다고 수는 없지만 시대가 바뀌어서 유연하게 생각하길 바라는데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질문) 들림
(답변) 대학생들 중에서 주사파는 전국에 300 정도밖에 없습니다. 수는 아니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봅니다.

(질문) 들림

(답변) 촛불시위는 우발적으로 일어났죠. 중학생 고등학생이 우발적으로 시작한 것인데, 3 정도 지났을 주사파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합류하기 시작. 사람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 한국 사회에서 조직화해서 움직이는 세력이 역시 주사파에요. 주사파가 수는 많지 않지만 가장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세력 같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시간이 가면 갈수록 주사파가 주도하는 구조로 가고 있습니다. 주사파가 주도하는 대표적인 조직이 민노당, 민노총입니다. 전교조는 완전 주도는 아니고 절반 정도가 주사파에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그런 것이 우려스럽습니다.

(질문) 진보연대도 주사파?

(답변) 제가 알기로는 주사파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래 내용은 김영환 씨의 활동에 대한 반발 글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9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