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적인 선교’는 지양해야 합니다. 아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까지’ 복음을 전하고 나눠야 합니다. 하지만 ‘공격적인 선교’는 오히려 복음이 전해지는 데 방해가 됩니다. 오히려 사탄의 밥이 될 수 있습니다.
siracusa by Andrea Costa Photography
‘복음을 전하는데 어떻게 공격적으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수동적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수동적인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공격적인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아예 전하지 않거나 복음을 너무 공격적으로 전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격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는 상대는 안중에도 없고 내가 갖고 있는 복음만을 일방적으로 설파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격적인 선교입니다. ‘공격적’인 선교를 하는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삼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13장의 예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술사를 노려보며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표준새번역)”라고 했던 말을 ‘공격적인’ 선교를 하는 사람들은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마술사는 사도 바울의 전도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13장에서 바울의 전도 대상은 총독이었습니다. 총독은 사도 바울에게 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했는데 마술사가 현혹을 하니 바울이 호통을 쳤던 것입니다. 마술사는 바울의 호통에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공격적 선교가 아니라 마귀를 쫓아낸 일이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4장에서도 이미 복음을 들은 이들이 놀라운 이적을 행한 후에 마음이 열리자 바울은 제우스를 섬기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피전도자들의 마음이 이미 열린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귀신을 쫓을 때는 계속 방해하거나(행 16:18), 피전도자의 마음이 열린 상태인데 이를 방해할 경우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짜고짜 다가가서 귀신을 쫓는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도 바울 일행은 유대 회당에서 무려 3주 동안 성경을 놓고 토론을 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방형의 전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도 행전 17장16절의 아테네에서의 전도는 어떻습니까.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본 바울은 격분하긴 했지만 일방적 공격적 선교를 한 것이 아니라 토론을 벌였습니다 (행 17:17). 아레오바고 법정에 선 것도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의 새로운 교훈이 무엇인지 듣고 싶다”고 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4절에도 보면 바울은 회당에서 토론을 벌였고 설득을 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사회는 토론문화가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19절에도 바울은 토론을 한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19장8절에서도 회당에 들어가 무려 3달 동안이나 하나님 나라를 강론하고 권면했습니다. 도무지 공격적 선교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피전도자의 상황에 민감한 전도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아데미 여신의 모형 신전을 만들어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바울의 제자들은 바울에게 군중 속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권했고 그는 이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피전도자에 민감한 사역을 했음에도 그는 투옥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로운 고난인 것입니다. 안하무인의 선교를 하다가 투옥되거나 붙잡힌 바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재판을 받을 때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를 고발한 사람들은 내가,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성내에서, 누구와 논쟁을 하거나, 군중을 선동해서 모으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행 24:12).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선교가 절대 공격적이지 않다는 것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는 덧붙여 설명합니다. 그들은 “내가 작당을 하거나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행 24:18).
바울은 결코 소동을 일으키거나 선동하거나 논쟁을 하면서 선교를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에 풍선을 보내는 일은 ‘공격적인 선교’인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공격적인 선교가 아닙니다. 이유는 피전도자가 풍선 방식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풍선을 보낼 때 구제물자를 보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기 위해 풍선을 찾아나섭니다. 장롱 속에 있는 MP3 하나를 풍선에 넣어서 보낼 때 그것을 얻는 자는 한 달치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피전도자를 배려한 전도방식인 것입니다. 풍선에 복음을 실어 나릅니다. 풍선에 성경말씀을 씁니다.
이를 누가 싫어합니까? 김정일과 고위 관료들이겠죠. 그들은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표준새번역).”라고 했고 우리도 악의 정권을 향해 그런 외침을 할 수 있습니다.
‘공격적 선교’와 ‘성경적 선교’가 이제 명확히 구별되십니까?
[그날까지USA 박병기 목사]
'크리스천 생활 >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0) | 2011.03.11 |
---|---|
어떻게 기도할까? (0) | 2011.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