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인권관련 참모를 역임 한 바 있는 호로위츠는 워싱턴DC 중심가인 15가 건물의 6층에 자리 잡은 허드슨연구소 사무실의 선임연구원이다. 그가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2003년 6월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의료활동을 벌이다 추방당한 독일인 의사 노르베르트 폴러첸 박사로부터 북한의 실정을 듣고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두기시작했다. 그는 폴러첸 박사와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이 허드슨 연구소에서 국제 인권에 관련해 일했던 것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미시시피대학교와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법학교수로 근무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예산관리국의 법률고문과 국내정책자문위원회 의장으로 일했던 호로위츠는 곧바로 미국 내 인권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해, '북한자유연대'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했다. 그는 이후 '북한자유법안'의 초안을 작성했다. 2004년에는 미국 관가와 상-하원 의원들에게 널리 배포된 '미국의 대북정책: 수단과 인식'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2005년에는 탈북자 6명이 난민 지위를 받아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입국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호로위츠 씨는 이렇게 열심히 북한을 위해 일했지만 북한 인권 문제는 자신의 인생 최대 실패작이라고 얼마 전 열렸던 2011년 KCC 워싱턴DC 횃불대회 및 인턴십에서 말했다. 이 말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여러 차례 했던 말이다. 그는 2004년 북한인권법이 통과되는데 기여한 바 있지만 이후 100명도 안 되는 탈북자가 미국에 들어온 것을 두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재미 한인 사회가 북한 문제에 대해 수동적인 것에 속이 상했다고 했다. 그는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주제로 한 기도회에 가보면 ‘하나님, 북한 주민을 구출해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해 너무 속상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제발 바꾸라고요. ‘우리가 북한 돕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라고요. ‘당신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나님더러 대신해달라고 하지 말고, 재미 한인이 그 일을 할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고요. “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미주 한인 종교지도자에게, 한인 사업가에게, 한인 학생에게 말합니다. 경제적 성공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영어 실력이 짧아도 괜찮습니다, 한인들이 뭉치면 미국 정부를 움직일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후세대가 동족에게 무관심했던 당신들에게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UTD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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